까까머리 어디에? 고시엔이 변했다 [경기장의 안과 밖]

까까머리 어디에? 고시엔이 변했다 [경기장의 안과 밖]

최고관리자 0 191,368 06.08 13:10
근성과 복종을 강조하던 일본 고교야구가 변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즐기는 야구가 각광받는다. 지난해 우승팀 게이오 고교는 ‘인조이 베이스볼’을 모토로 한다.

지난해 8월23일 일본 고시엔 스타디움에서 열린 고교야구전국대회 결승전에서 가나가와현 대표 게이오 고교 선수들이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를 8-2로 꺾은 뒤 환호하고 있다.©교도통신


일본 고교야구는 ‘고시엔’으로 상징된다. 매년 봄과 여름에 열리는 고교야구전국대회, 그리고 이 대회가 열리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약칭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 스포츠 저널리스트 로버트 화이팅은 고시엔 대회를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머리를 빡빡 깎은 고교 선수 수백 명이 출신 지역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우고 절도 있게 줄지어 입장한다.” 화이팅은 일본 야구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낸 베스트셀러 작가다. 1977년 펴낸 책 제목은 〈국화와 배트〉다. 미국인 관점에서 일본 문화를 다룬 루스 베네딕트의 명저 〈국화와 칼〉을 오마주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일본 야구는 매우 낯설게 묘사된다. 고교야구대회의 ‘까까머리’도 그중 하나다.

일본 야구는 오랫동안 ‘근성’과 ‘열혈’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무한 노력주의’를 숭상했다. 한편으로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했다. 일본 근현대사와 무관치 않다.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0년대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30년대 일본 야구에서 ‘근성’ ‘집단’을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라고 지적한다. 까까머리는 근성과 집단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까까머리는 지금 일본 고교야구에서 ‘소수파’다. 다카라 가오루 일본고등학교야구연맹 회장은 고시엔 구장 개장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인터뷰에서 이런 통계를 소개했다. “부원 두발을 삭발하는 학교가 26%까지 줄었다.”

다카라 회장은 “예전에는 스파르타식 훈련이나 근성주의가 고교야구에서 주류를 이뤘다. 훈련 중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거나, 투수가 과도한 투구 수를 기록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라고 한 뒤, “‘근성 야구’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근성의 자리를 ‘과학’으로 대신하려 한다. 다카라 회장은 “고교야구를 더 현대적으로 바꾸고 싶다. 조직 운영이나 정보 발신, 커뮤니케이션 방법 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야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노력도 검토하고 있다. 지금은 투구의 회전수나 회전축, 타자의 스윙, 타구의 스피드, 비거리 등을 분석할 수 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술 향상과 부상 방지를 이루고 싶다”라고 했다.

지난해 여름 고시엔 대회 우승팀은 가나가와현 대표 게이오기주쿠(게이오) 고교였다. 야구 특기생이 전무한 학교의 우승으로 화제를 모았다. 또 다른 화제는 ‘두발’이었다. 일본 고교야구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이 공존하고 있다. 고시엔 대회 본선에 출전해 좋은 성과를 거두는 학교 다수는 야구 특기로 입학한 부원들이 주축이다. 대개 이런 학교 야구부원들은 까까머리다. 하지만 8월23일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와 치른 결승전에서 마지막 아웃을 잡은 뒤 그라운드를 달리는 게이오 선수들의 머리카락은 ‘찰랑’거렸다. 전형적인 까까머리가 아니었다.

머리카락 짧다고 야구 잘하나


게이오 야구부의 모토는 ‘인조이 베이스볼(야구를 즐겨라)’이다. 이 학교 모리바야시 다카히코 감독은 같은 학교법인 산하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야구부를 지도하고 있다. 그는 고교까지는 야구부 선수로 뛰었지만 대학에선 평범한 법학도였다. 대기업 NTT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고교야구 지도자가 되고 싶어 퇴직했다. 그 뒤 쓰쿠바 대학에서 코치학을 전공하며 지도자가 될 준비를 했다.

모리바야시 감독은 올해 1월 한국 아마추어 야구 관계자와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온라인 강연을 열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인조이 베이스볼’에 대한 오해가 있다. 웃고 즐기면서 야구를 하자는 게 아니다. 더 높은 레벨의 야구를 즐기자는 취지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더 높은 레벨의 야구’는 과거의 낡은 야구과 대척점에 있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는 이기는 게 전부라는 ‘승리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이가 많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래서 선수 혹사 등 나쁜 일이 일어났다. 고교야구는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자기 행복을 스스로 추구하는 시대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야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고교 때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야구를 통해 익히는 걸 지향한다.”

“선수가 ‘감독의 말을 따르니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야구를 추구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다 보니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야구는 팀이나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선수 자신의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야구를 해야 한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이를 돕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다.”

“‘인조이 베이스볼’은 일본 야구의 낡은 가치관과 싸우고 있다. 집단에 자기를 맞추는 동조 압력, 변화에 소극적인 구태의연함, 지도자와 선수, 선배와 후배 사이 상명하복과 절대복종,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익숙한 것을 따르는 고정관념 등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따르면 한국 고교야구에는 두발에 대한 규정이 없다. 하지만 거의 모든 야구선수가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짧게 깎는다. 클럽야구팀인 앱티브 BC를 지도하는 유정민 감독(54)은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고 야구부를 맡았다. 그는 서울고 시절 ‘두발 자유화’를 실시한 감독이다. 유 감독은 “처음에는 두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1~2년 정도 지나니 ‘굳이 짧은 머리를 고수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머리로 선수와 일반 학생 사이 차이를 두는 게 불편해졌다”라고 말했다.

선수들은 좋아했다. 유 감독 시절 서울고는 자율을 중시하는 기풍으로 유명했다. 자유로운 두발이 서울고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자부심이 서서히 생겨났다. 물론 반대도 있었다. 유 감독은 “야구계나 동문들로부터 ‘학생 선수답지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리카락을 짧게 깎는다고 해서 야구를 잘하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지도자는 선수가 야구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역할이다. 억지로 선수를 끌고 가려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국가대표팀이 참패한 뒤 한국 야구의 위기에 대한 여러 진단이 나왔다. 그중 일부는 고교야구로 향했다. ‘겉멋 든 학생 선수’를 비판하거나, ‘(과거 고교야구에 비해) 열정과 진정성이 위축됐다’는 주장도 있었다. 유정민 감독은 이런 견해에 반대한다. 그는 “결국 옛날처럼 ‘정신력’을 중시하자는 얘기들이었다. 솔직히 화가 났다. 일본 야구가 버리고 있는 낡은 것들을 고수하는 지도자가 아직 많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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